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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9월의 평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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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밤 효현이가 놀러 왔다. 저녁 식사 후 술자리로 이어진 테이블에 창현이가 등장했다. 우리 셋은 연극 작업으로 만난 10년 지기 친구인데 효현이와 내가 함께 있는 것을 알고 창현이가 영상 통화를 걸어온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직접 쓴 산문 몇 개를 친구들에게 보여줬다. 통화의 말미에 창현이는 온라인 서점 아이디를 묻더니 책을 선물했다. 서점에선 태풍 탓에 택배가 하루 늦게 도착할 거라고 연락이 왔다.


창현이가 막 서울에 상경 했을 무렵, 나는 뮤지컬을 만들게 되었다. 극단 회의 중 "우리 다 뮤지컬 좋아하니까 다음 작품은 뮤지컬 해보자"라는 농담이 흘렀고 그 농담이 공식화된 것. 공연을 올리기 위해선 작품에 대한 라이센스가 필요한데 우리에겐 자금이 없었다. 방법은 창작 밖에 없었고 연출을 맡게 된 나는 직접 대본을 만들었다.

60페이지 분량의 이야기를 만들고 총 7~8곡의 노래를 만들었다. 멜로디를 떠올리고 거기에 가사를 입혀 녹음한 것을 단원들에게 들려줬다. 모두 마음에 들어했지만 그 노래엔 반주가 없었다. 편곡 작업, 반주를 만드는 일. 그것을 거쳐야 노래가 되는 것을 몰랐다. 부랴부랴 주변의 방구석 기타리스트와 피아니스트를 총동원했다. 하지만 반주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창현이 재즈 피아노를 배웠다는 것이 기억났다. 연락을 했다. 아마 "네가 필요하다" 정도였고 창현이는 곧장 부산으로 넘어와 키보드 앞에 앉았다.

"여름밤 공원에 벤치가 하나 있고 잔디가 쭉 깔린 곳이야. 초록 나무들이 무성하고 흰색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남,녀가 대화 나누고 있는 거지. 알겠나?" 분위기를 들은 창현이가 건반을 눌렀고 단 번에 마음에 드는 반주를 얻었다. 우린 짜릿한 창작의 쾌감을 나눴다. 공연은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택배입니다. 우편함에 책 넣어두고 갑니다' 우편함에는 잡다한 문서와 두권의 책이 담겨 있었다. 모두 챙겨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아파트 입구를 바라봤다. 태풍이 남기고 간 것들. 깨끗한 공기와 선명한 햇살. 선선한 바람과 큼직하고 빠르게 흐르는 구름. 이 선물을 조금 더 멋진 곳에서 풀고 싶었다. 아파트 모퉁이 공터에 낡은 벤치가 있는데 잡풀과 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벤치에 햇살이 앉아 있었다. 선물을 풀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택배에는 두 권의 책이 있었다. 하나는 읽고 싶었던 것, 하나는 이미 읽은 것. 창현이의 선물은 마치 한 번의 설명으로 만들어진 노래같았다. 설명과 이해가 필요치 않은 우리 덕에 나는 잠시 평화를 느꼈다. 선선한 바람을 턱으로 받으며 잠시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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