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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퇴고, 없이 공개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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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뮤지컬을 올린 적이 있다. 시간과의 싸움. 소재를 떠올리고 사나흘만에 써 내렸다. 연출도 맡아야 하는 상황이라 작품을 진행하며 퇴고를 겸했다. 2달 뒤 작품을 올렸고 팀원들과 관객의 반응도 괜찮았다. 잠시 긍정적 평가에 취했지만 취기가 사라질 즈음 대본을 다시 읽게 되었다. 과잉된 감정들, 불편하게 반복되는 이야기들, 불필요한 수사 등. 날 것에 가까운 대본에 부끄러워졌다. 스스로 만족하지 않으면 타인의 긍정적 평가도 의심하게 된다. 첫 대본은 여전히 퇴고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

요즘 인스타그램에 글 올리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온라인 연재를 시작하기 전 부족한 부분을 준비하기 위한 일인데 금세 부족함이 드러났다.

퇴고되지 않은 글은 정리되지 않은 말과 다를 게 없다. 글을 쓰는 이유는 말로 하지 못한 것, 정리하지 못한 생각들을 기록하기 위함인데 글이 말과 다를 게 없다면 쓸 이유가 없다. 그런데, 조급함에 퇴고되지 않은 글을 공개하고 있다.

쓰는 순간부터 불안한 글들이 있다. 어제가 그랬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정해졌지만 집중력이 흩어지고 자꾸 다른 곳으로 흐르는 날. 하나의 글에서 여러 가지 핵심을 논하게 되고 결국 이야기를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 글이 아닌 정치질을 시작한다. 문장과 문단 속에서 비어 있는 논리를 찾고 채워 넣기 급급하다. 사실 이럴 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편이 옳다. 용기내서 지우고 생각을 정리한 뒤 운을 떼기만 하면 쉽게 다시 쓸 수 있다. 하지만 어젠 그러지 못했다.

비어 있는 논리를 채워 넣고 보니 말은 된다. 단, 이런 경우 퇴고가 복잡해진다. 엉켜있는 논리를 한 눈으로 관찰하고 동시에 디테일한 부분들을 수정해야 한다. 보통 퇴고까지 마무리하면 개운한 기분을 느끼지만 어제는 개운함은 커녕 찝찝함만 가득했다. 정말 '얼추 됐네'라는 마음으로 글을 공개했다. 글에 눌려지는 공감수는 이제 개의치 않지만 내 기분이 처참했다. 실제로 공감수도 적었다.

오늘, 글을 다시 읽어봤다. 한 결로 흐르지 않았다. 지워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다시 퇴고를 했다. 역시 만족스럽지 못했다. 논리 채우기의 연속. 이런 글로는사람들에게 돈을 받을 수 없다.

문제점을 따져봤고 글에서 벗어나 근원적 문제점을 찾았다. 체력이 부족했다. 하루를 살고 남은 체력으로 글을 쓰니 주제에 몰두할, 퇴고에 필요한 집중력이 남지 않았다. 체력이 많은 시간대에 글을 쓰기 위해 일상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 이야기에 반드시 의미를 결부 시키려는 집착이 느껴졌다. 꼭 글이 어떤 의미를 남기지 않아도 된다. 글도 노래도 그림도 의미는 듣고 보는 이에게 맡길 몫이다. 억지스런 의미는 강요와 다를게 없다. 의미가 아닌 남기고픈 이야기에 집중하자.

아직 연습 단계라 얼마든 시행 착오를 겪을 수 있다. 단, 반성과 개선은 반드시 필요하다. 즐거움만으로 글쓰는 시절을 닫고 노력과 통증에 익숙해져야 한다. 내일은 아침에 노트북을 열어야겠다. 어제의 글을 다시 퇴고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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