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공항은 붐볐다. 모두 마스크를 썼지만 웃고 있었다. 덩달아 즐거워졌다. 부담스럽던 캐리어가 잘 정돈된 바닥과 만나 말랑말랑하게 굴러간다. 이번 여행은 다이빙 트레이닝이라는 목적이 분명하다. 때문에 강사님에게 맞춰 스케쥴이 결정된다. 짐을 줄이고 싶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디서 자게 될지, 개인 시간이 얼마이며 어느 바다에서 다이빙을 하고 이동은 어떻게 하는지 등 사전 정보가 없었다. 기동성이 중요하다 느꼈고 차를 빌리는 것보단 짐을 줄이는 것이 경제적이라 판단했다.
일정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지만 하루라도 더 훈련하기 위해 일요일 오후 비행기를 선택했다. 여유롭게 도착해 숙소 근처를 산책하고 괜찮은 식당을 발견해 만족스러운 식사 후 일기를 쓰고 잠드는 안락한 첫 날을 상상했다. 우선 서귀포로 가야 했다. 북에서 남을 가로지르는 여정. 버스 시간표를 확인했다. 제주도 배차간격의 악명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겪으니 만만치 않았다. 다음 버스까지 한 시간. 숙소까지 걸리는 시간은 두 시간. 총 세 시간의 여정이었다.
스마트폰 충전기를 깜빡했다. 캐리어를 샅샅히 뒤졌지만 충전기는 나오지 않았다. 엉거주춤하게 앉아 캐리어를 뒤지는 모습이 참 볼품없게 느껴졌다. 충전기를 사기 위해 공항 편의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화장실도 한 번 더 들렀다. 캐리어가 부담스러워졌다. 며칠을 이렇게 지낼 자신이 없었다. 자유시간이 생겨도, 당장 오늘 밤 숙소에 도착해도 어디도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게이트를 빠져나와 렌터카 사무실로 쏟아져 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경제적으로 여유롭던 시절에는 돈으로 꽤 많은 편리를 구매했다. 가까운 거리도 차를 몰았고 대부분 끼니는 식당에서 해결했다. 그 외 일상의 많은 부분이 그랬다. 캐리어를 멈췄다. 버스 정류장과 렌터카 사무실. 그 사이 어디쯤, 어중간하게 서서 렌트 비용을 검색했다.
삶의 관성은 불편이라는 장애 앞에서 나를 과거로 당기고 있었다. 일상에서 누리는 모든 편리를 제주도로 옮기고 싶어 했다. 만만치 않은 비용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전과 다르다. 경제적 상황이 많이 변했다. 변한 만큼 방식을 바꿔야 했다. 버스를 기다리기로 했다. 일정을 '도착 후 식사와 산책, 요가, 일기 쓰기 등'에서 '이동'으로 바꿨다. 붐비던 마음이 멈췄다. 야자수가 흔들거렸다.
짐칸에 캐리어를 싣고 버스에 올랐다. 짐칸을 닫는 것을 깜빡했다. 기사님께 혼쭐이 나고 주눅 들어 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숲 속을 지난다. 오래전 비자림로를 운전하며 "마음 편히 감상하고 싶다"라고 했던 일이 떠오른다. 턱을 괴고 숲을 바라보는데 뒷자리 커플이 대화를 나눈다. 주름 짙은 서울 말씨. 다정히 창밖을 수다 떨던 커플은 나와 같은 곳에서 하차했다. 스마트폰도 없이 두리번두리번 갈 곳을 찾는 눈. 두 사람이 꼭 붙어 방향을 잡는다. 아, 버스에서 내리며 기사님께 용기 내어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아저씨는 "네. 짐 조심해서 내리세요"라고 답했다. 캐리어가 가뿐해졌다.
일상의 모든 것을 여행으로 옮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그것을 여행이라 부른다. 원하는 삶의 모습을 여행으로 확인하고, 연습하고 싶었다. 시간이나 타의에 떠밀린, 늘 해오던 선택이 아닌 그것들을 관통하는, 용감한 선택들로 삶을 이끌고 싶다. 내 삶이 그랬으면 좋겠다.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쓰레기 같은 제주도 (0) | 2020.08.11 |
---|---|
중문해수욕장: 가끔 그런 날이 필요하다. (0) | 2020.08.07 |
여행의 욕심-짐 (0) | 2020.08.03 |
[급한산도1박]통영/한산도에서 먹은 것(김치찌개 강추) (2) | 2020.05.05 |
[급한산도1박] 한산도로 가는 길 (2) | 2020.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