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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의 라틴 아메리카

[테이블 위의 라틴 아메리카 ep.6] 헤로니모 임,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영웅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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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지칭한다. 후에 그 의미가 확장되어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민족 집단 또는 그 거주지를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쿠바에는 고향을 떠나 살게 된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있다. 이 이야기는 대한 제국에서 시작된다. 1904년 12월 24일. 황성신문의 농부 모집 공고란에 다음과 같은 글이 기고된다.

'묵서가(멕시코)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거짓이었다. 멕시코로 건너간 1033명의 한인은 매를 맞고 죽임을 당하며 노동 착취와 비인간적인 대우를 겪어야 했다. 계약기간은 4년이었다. 고국으로 돌아가리라는 기대만으로 버텼고 4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들에겐 돌아갈 뱃삯이 없었다. 뱃삯을 모으기 위해 1년을 더 일해야 했고 1910년이 되었다.

‘경술국치의 해'

같은 해 8월, 일본은 비열한 수법으로 대한 제국의 국권을 침탈했다.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한일합병조약을 통과시켰다. 대한 제국은 통치권을 도둑맞았고 국민은 국가를 잃었다. 그것은 멕시코에 있는 한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돌아갈 곳을 잃었고 그렇게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1920년대 쿠바의 경제는 호황을 맞았다. 멕시코에 있던 한인들도 새로운 터전을 찾아 쿠바로 향했다. 그중에 독립운동가 임천택이 있었다. 김구 선생의 백범 일지에는 상해 임시 정부 후원금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이름과 함께 '쿠바의 임천택’이라는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

지구 반대편으로 건너온 한국인들. 아니, 사실은 조선인에 가까운 사람들. 그들은 탐험가도 모험가도 여행자도 아니었다. 그저 아들, 딸 배불리 먹이고 부모님 호강시켜 드리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 꿈은 오로지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 하나였다. 그러기 위해선 도둑맞은 조국을 찾아야 했다. 죽을힘을 다해 애니깽 농장에서 일했다. 선인장 줄기 하나를 잘라 그것을 여러 갈래로 찢고 다시 묶는 일의 반복. 그 묶음을 200개 만들면 2페소를 받았다. 일주일에 13-14페소를 버는 힘든 삶이었지만 하루에 쌀 한 숟갈씩을 모아 독립자금을 조성해 임시 정부로 보냈다. 그 중심에 임천택이 있었다. 그는 한인회를 운영하고 주말마다 한글을 가르치러 다녔다. 한인들이 정체성과 뿌리에 대한 긍지를 갖도록 도운 것이다.

임천택은 슬하에 6남매를 두었는데 장남인 ‘헤로니모 임’이 그의 기질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아들 헤로니모 임 역시 아버지 임천택과 마찬가지로 조국을 위해 사명을 다 한다. 하지만 쿠바에서 나고 자란 헤로니모 임의 조국은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쿠바 혁명. 당시 라틴 아메리카는 유럽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미국의 거대 자본에 의해 휘둘리는 실정이었다. 정치인들은 부패해 미국의 바짓가랑이만 붙잡았고 소수 민족은 사회에서 소외되고 노동자들은 학대받았다. 혁명가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소수 민족과 노동자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돌려주고 번영을 함께 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민중을 위해 목숨 바쳤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사랑과 헌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 그 혁명의 심장부에 헤로니모 임도 있었다.

그는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선전 활동과 혁명 자금을 만들며 혁명군에 일조했다. 혁명은 성공했고 이후에는 쿠바 정부에서 일하며 공을 세웠다. 죽음을 불사한 시절이었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이 모두의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쿠바의 사회주의는 몰락의 조짐을 보였다.

혁명가는 혁명의 결과와 이후의 사건들로 출발점의 마음을 검열 받는다. 그것은 대의를 내건 자들이 거쳐야 할 숙명. 헤로니모도 출발점의 마음을 검열 받았을 것이다. 스스로도 검열했을 것이며 어떤 이는 쿠바 혁명에 가담한 코레아노의 음흉한 속내를 안줏거리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청춘을 바친 일이 몰락하자 그는 삶의 목표를 잃고 고독에 빠졌다고 한다. 하지만 세상이 그에게 시킬 일이 남았던 것일까?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대한민국은 재외 동포를 초대했고 헤로니모는 자신의 아버지가 고국을 떠난 지 90년 만에 한반도에 발을 딛게 되었다. 그리고 출발점의 마음이 순수했음을 삶으로 증명했다.

한국을 방문한 그는 아버지의 흔적을 만났고 정체성의 조각이 한반도에 있음을 느꼈다. 동시에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을 ‘코리안 디아스포라’들을 떠올렸다. 그는 쿠바로 돌아와 곳곳에 흩어진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찾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한글 교육을 시작했으며 쿠바 이민 역사 책을 출판했다. 한인회를 만들기 위해 곳곳에 흩어진 한인을 찾아다니고 이민이 시작된 마나티 항구에 한인 기념비를 세우는 등 남은 생을 한인을 위한 사랑과 헌신으로 가득 채웠다. 혁명은 그의 사랑과 헌신을 담는 시대적 그릇일 뿐이었던 것이다.

특별한 일을 하기엔 내 삶의 드라마가 빈약하다는 한심한 망상에 빠질 때가 있다. 고통스럽고 비참한 상황을 이겨내고 특별한 일을 해내는 사람들을 보며 내 고난의 빈약함을 아쉬워한다. 만약 실제로 그런 처절한 드라마가 삶에 펼쳐졌다면 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조국을 잃은 이민자의 2세로 태어나 뜨거움을 품고 혁명에 몸을 담갔던 사람. 그 혁명의 몰락에서 실패를 인정하고 다시 한번 타인과 세상을 사랑했던 사람. 쿠바의 코리안 디아스포라들은 변호사이자, 아버지이며, 할아버지로 그를 기억한다. 헤로니모 임은 쿠바 한인 사회의 버팀목이었다. 이 여행을 통해 헤로니모 임, 임은조라는 '좋은 어른'을 만난 것에, 그리고 알릴 수 있음에 축복과 기쁨을 느낀다.

 

*이 이야기는 독립영화 '헤로니모'를 토대로 써내렸습니다. 독립 영화의 손익 분기점은 관객 수 2만 명이라고 합니다. 2019년 11월 개봉한 독립 영화 '헤로니모'는 만 명에도 미치지 못한 관객 수로 스크린 상영을 마쳤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한국계 미국인 전후석 감독입니다. 그는 뉴욕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지만 평생의 화두였던 디아스포라를 해설해 줄 멋진 캐릭터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본업을 내려놓은 체 다큐멘터리를 제작합니다.

저는 여행에 앞서 쿠바라는 국가를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즐거운 나라라고 생각했지만 알아갈수록 슬픔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몸으로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이 영화는 쿠바에 깔려있는 슬픔 중 일부라도 나의 것처럼 느낄 수 있게 도와줬습니다. 덕분에 슬픔을 딛고 피어난 즐거움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감사의 의미로 홍보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여러 플랫폼을 통해 이 영화를 구매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1900년대 노예처럼 이주했던 선조들의 역사를 알리고 삶을 던져 정체성을 기록한 동시대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전후석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좋은 작품입니다. 거실에서 타닥타닥 두들긴 타자 소리보다 훨씬 큰 생명의 심장 소리가 느껴집니다. 당신에게 영화 '헤로니모'를 추천합니다.

 

*테이블 위의 라틴 아메리카는 상상으로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하며 쓴 에세이입니다. 모든 상황과 인물은 픽션입니다. 코로나로 여행길이 막힌 지금 굳어버린 세포를 깨우는 촉매제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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